현대 인류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있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화가 Vincent Willem Van Gogh (RIP 1853 ~ 1890) 그의 생에에 관하여.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자 평생동안 노력했으며, 있는 그대로가 아닌, 그가 느끼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그림 속에 녹여내고자 했다. 그는 37년 생에 공식적으로 한 점의 그림만 팔아본, 그렇기에 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받으며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동생 테오의 아내 요한나의 노력 덕분에, 그의 그림들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이후, 요한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빈센트와 테오가 주고받았던 서신을 모아, '빈센트 반 고흐: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집필했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반고흐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의 생전 작품가격은 10만원도 하지 않았으나, 현재는 1000억원이 넘는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살아생전 인생은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며, 죽음 이후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내 가슴 한 켠을 아프게 하며,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생에에 관해 잘 정리된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그의 생에와 함께 그림을 같이 이해하면 더욱 풍부하게 고흐를 이해할 수 있다.
1. 10 ~ 20대의 어린 시절
- 북 네덜란드 준데르트(Zundert) 태생
1.1. 구필 화랑(헤이그)에서 일을하며 밀레의 그림 세계에 푹 빠지다
- 장래가 촉망한 미술상의 길을 걷고 있었음
- 판화로 보게 된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1857)》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알려짐. 밀레는 농부들의 일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기에 가난했지만,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림모습을 존경했다고 함.
- 이후, 고흐의 그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침
1.2. 벨기에의 탄광지대에서 ‘탄광의 그리스도’라고 불리다
- 구필 화랑 런던 지점을 내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됨. 여기서 산업화의 양면성을 느끼고 큰 충격을 받게됨. 엘리트 중심 주의의 미술에 대한 회의감과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다고 함.
- 이 시점부터, 고흐는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짐
- 이후 고흐는 구필 화랑(파리) 지점에서 계속 일을 했으나, 결국 해고되고 난 이후 종교에 심취
- 목사가 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목사 고시를 준비했으나 실패. 평신도 선교사 시험 마저 탈락.
- 그럼에도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지대로가서 선교사 자리를 따냄. 이곳에서 성경 강의, 설교 등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곳에서 '탄광의 그리스도'라고도 불림
- 바쁜 와중에도 그럼에도 스케치를 쉬지 않음. 농부, 광부 등을 주제로해서 드로잉 연습을 함
- 설교 능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선교사 계약 연장 실패
1.3. 헤이그로 돌아와 안톤 마우베에게 기초를 배우다
- 수채화와 유화의 기초를 배움. 고흐의 전기 그림 화풍에 큰 영향을 줌
- ‘시엔’이라고 불리는 매춘부 모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 이로인해 아버지, 안톤 마우베와 큰 갈등을 겪었음.
- '시엔' 을 그린 작품, 《슬픔 (1882)》. 그는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것이 아닌, 자신이 느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함
- 하지만, 결국 다시 매춘부 생활로 돌아간 시엔과 결별
2. 30대 시절
2.1. 부모님 집, 뉘넨(Nuenen)으로 다시 돌아오다
- 아버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성경책이 있는 정물 (1885)》을 그림
- 독립적 화가로의 도약을 위해 큰 프로젝트 결심. 밀레의 영향을 받아 평범한 농부의 일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림
- 엄청난 연습을 통해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완성: 약 45점의 드로잉 연습 후 3월~5월 초까지 습작에 수정을 거쳐 《감자 먹는 사람들》 탄생
- 고흐는 자신의 첫 걸작이라고 자부했으나, 당시 동생 테오와 다른 평론가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임.
2.2. 프랑스 파리(Paris)로 이동하여 인상주의를 만나다.
- 인상주의 화풍(폴 고갱, 폴 세잔, 조루즈 쇠라)에 영향을 받아 기존 북유럽풍 어두운 색조에서 밝고 화사한 톤으로 화풍이 변화함.
- 평범한 농부의 주제에서 파리의 초상화, 풍경화, 카페 거리 등 일상을 표현
- 파리 시절 대표작 《탕기 영감의 초상 (1887)》 완성. 고흐의 파리 시절 대표작. 본 작품은 일본 판화에도 영향을 받음 (우키요에; 원근법 파괴, 명암 없음)
- 파리는 이제 고인물 세상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함.
2.3. 남프랑스 아를(Arles)로 이동
- 고흐가 아를로 도착했을 당시, 당시 겨울은 28년만에 가장 추운 겨울.
- 아를에서 집을 구함. 집도 있겠다, 여기서 ‘화가 공동체’를 구상. 회원 모집공고를 주변에 알렸으나 반응이 없음
- 초심을 되찾음. 매일 들판으로 나가 농부, 밀밭 등을 다시 그리기 시작.
- “폴 고갱”만이 유일하게 내려옴. 고갱을 대접하기위해 《해바라기 (1887-1888)》 연작 탄생. 고흐에게 해바라기는 태양을 연상케하는 꽃으로, 희망을 상징함
- 희망을 품었으면서도 한 편으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불안감을 많이 느낌. 《아를의 밤의 카페(1888)》 고흐의 고독과 불안감이 드러남.
- 고흐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자 함. 대표적으로,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및 《론 강의 별이 빛나는밤 (1888)》.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닌, 밤의 색들을 풍부하게 표현. 밤하늘을 어두운 검은색이 아닌 파란색과 보색 대비를 활용하여 색채를 풍부하게 함.
- 고갱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노란집(1888)》과 《아를의 침실 (1888)》을 그림
2.4. 고갱과의 생활, 시작과 끝
- 고갱은 고흐의 "화가공동체 구축" 목표와는 다르게,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 지원을 약속받기 위해 고흐와 함께 지냄
- 초반에 둘은 들판으로 나가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결국 성격차이로 인해 함께 사는 내내 싸움
- 대표적으로, 《아를의 여인 (1888)》 을 그리는 중 모델 해석에 대해 큰 다툼을 했다고 알려짐
- 그도 그럴것이, 서로 생각이 너무 달랐음. 고갱은 테오의 후원을 받기 위해, 고흐는 세상을 뒤엎을만한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를 그렸는데, 여기서 그가 평소에 고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감정이 실림
- 파리에서 고갱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자 고갱이 떠날 준비를함. 이에 고흐는 실망감, 불안 및 고독감을 다시 느낌.
-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날, 둘은 크게 싸우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기이한 행동을 함 (고갱이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음.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는듯함)
- 이후 고갱은 고흐를 떠남
2.5. 생레미 정신요양원으로 스스로 입원.
-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방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림. 《붓꽃 (1889)》 탄생.
- 환각 증세가 점차 심해지며 야외에 나가 활동을 할 수 없게됨. 기억에 의존하여 그린 그림. 《별이 빛나는 밤 (1889)》
- 자기 자신과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음. 여기서 많은 걸작들을 쏟아냄.
- 또한,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을 모작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자신만의 느낌을 추가하여 작품을 완성 《정오의휴식 (1890)》
- 테오와 요한나가 아들을 낳음.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를 위해 가장 밝은 아몬드 나무를 그려 선물로 줌 《꽃피는 아몬드 나무 (1890)》
- 이 무렵, 알베르 오리에라는 젊은 비평가가 잡지에 고흐의 그림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하며, 서서히 고흐의 그림이 알려지기 시작함
- 브뤼셀에 열리는 전시회에 동생 테오가 고흐의 작품 6점을 출품했는데, 여기서 《아를의 붉은 포도밭(1888)》을 400프랑에 판매됨. 공식적으로 고흐 생전 판매 된 유일한 그림
2.6. 오베르 쉬르 오아주(Auvers-Sur-Oise)에서 폴 가셰 박사를 만나다
- 병원을 떠나 오베르로 가기 전, 《영혼의 문턱에서(1890)》 작품 완성. 완전히 절망에 빠진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듯 하다
- 가셰박사는 세잔, 마네, 르누아르, 주치의로서 경험이 있기에 예술가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깊이 공감하며 고흐를 치료하고자 노력함
- 《오베르의 교회(1890)》, 《폴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두 점을 그렸으나, 첫 번째 그림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
- 테오는 돈이 모이지 않아 화상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했으나 사업마저 잘 안됨. 테오와의 관계도 악화되며 미래에 대한 불안, 고독, 외로움을 극한으로 느낌
-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까마귀 나는 밀밭 (1890)》.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37세 고흐는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짐.
3. 죽음 이후
- 사망 이후, 테오는 고흐의 추모전을 열게 되고, 동료 화가들과 기자들이 왔으며, 이로부터 고흐의 작품이 더 세상에 알려지게 됨
- 계속해서 건강이 악화된 테오도, 형의 죽음 이후 반 년만에 세상을 떠남.
-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테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서신들을 알게됨.
- 고흐의 작품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전시회를 꾸준히 주관함. 생활비 마련을 위해 작품을 정기적으로 하나씩 팔게 됨.
- 1905년 암스테르담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2천 여명의 관람객을 유치. 그녀의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작품을 인지하게 됨.
- 그녀는 더 널리 고흐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1916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마침내 영어로 된 책, "빈센트 반고흐:동생에게 보낸 편지"라는 책을 출간함.
- 이후부터 고흐의 이름과 그의 작품이 이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됨
- 참고자료
- Youtube video: 인문학이랑 -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 분석
- Youtube video: 지식트리 - 빈센트 반 고흐 10분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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